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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해성 (9) 성남서 광주까지 도보 극기훈련
작성자 : 최고관리자   DATE : 13-01-29 10:56

[역경의 열매] 김해성 (9) 성남서 광주까지 도보 극기훈련


대학 2학년 때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3학년 때는 편집장을 맡았다. 좀더 열심히 신문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정간을 당했다. 문제는 2개 면에 가득 실린 ‘혁명’에 관한 기사 때문이었다. 그 기사를 문제 삼은 정보기관의 압력 때문에 학보 발행이 중단된 것이다. 편집장으로서 할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1학년생 30명을 모아놓고 ‘수습기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습을 시켰다.

그러나 8개월이 지나도록 학보는 복간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몰래 학보 발행을 준비했다. 인쇄소에 찾아가 복간되었다고 둘러대고 학보를 찍어냈다. 다음 날 1교시가 끝나자 일제히 강의실에 학보를 던져넣었다. 8개월 만에 학보를 받아든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일로 학교측에서 퇴학 처분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결국 나는 편집장직을 그만뒀다.

대학 졸업 후엔 본격적으로 주민교회와 성남 지역 사역에 매달렸다. 교회 업무뿐만 아니라 철거민과 노점상,노동자 활동을 지원하는 일로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행동이 지식인의 허위 의식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나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평생 민중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장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고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주적(主敵)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나의 주적은 당시의 군사독재도,미제국주의도 아닌 끊임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싶어하며 안일에 빠지고 싶어하는 ‘나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극기훈련이었다.

먼저 성남에서 광주 망월동 묘지까지 걸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목적지를 광주로 잡은 것은 유동운이라는 죽은 친구에 대한 마음의 짐 때문이기도 했다. 밥은 얻어먹고 잠은 노숙하거나 공짜 숙박을 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초반부터 발목이 시큰거렸다. 방위로 근무할 때 야간 보초를 서면서 발목을 다쳤기 때문이다. 첫날 도보 후에 신발을 벗어보니 발가락마다 물집이 잡혀 있었다. 둘째 날은 물집 속에 피가 고여 터져나왔고 발목이 부어올라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이기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 이를 악물고 ‘하나님,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광주까지도 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라며 기도했다. 간첩으로 오인 받아 세번이나 경찰서와 군부대에 잡혀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망월동에 도착했다. 성남에서 출발한 지 7일만이었다. 몸은 만신창이인데 묘하게도 정신은 맑았다. 묘지 앞에 서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당시 학생 운동권에서 널리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두번째 극기 훈련은 금식기도였다. 예수님께서 40일을 하셨는데 똑같이 하면 교만해질까 싶어 그 반인 20일로 정했다. 20일을 채우고 보식하기 위해 간장 종지 2개에 미음과 동치미 국물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순간 목이 마비됐다. 너무 먹고 싶은 생각이 침샘을 자극했고 부어오른 침샘이 순식간에 목을 꽉 막아버린 것이다. 한동안 목을 풀어주고 난 뒤에야 간신히 미음을 삼킬 수 있었다.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후 나는 주민교회의 결의에 따라 카메라 렌즈를 생산하는 공장에 취업하게 되었다. 극기훈련도 무색하리만큼 현실의 노동은 매우 힘이 들었다. 기계에서 뿜어져나오는 기름이 온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야 2교대 작업이었는데 낮에는 교회 일과 지역 일을 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야간작업은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1년이 가까웠을 때 해고되고 말았다.

정리= 박동수 편집위원
d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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